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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더 데빌>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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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 -헤드라인

※ 이 글은 해당 작품의 스포일러를 다수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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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작 뉴턴은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으며, 애플(Apple)사는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를 CI 로고로 사용하고 있다. 여러 가지 속설이 있지만, 어쨌든 ‘사과’는 이들을 계기로 ‘이성과 발견’을 상징하게 되었다. 한편 이보다 오래된 사과의 상징은 ‘사랑과 유혹’ 그리고 ‘소중한 아름다움’이다.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금단의 과일, 아프로디테를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만들어준 황금 사과 그리고 백설 공주를 유혹했던 탐스러운 사과까지가 그러하다. 또한 성서 《창세기》에서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남자는 노동의 고통을 짊어지게 됐으며, 반면에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성’을 지녔다」고 언급 한다. 오는 11월 2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되는 뮤지컬 <더 데빌>에 이 모든 사과의 의미가 복합적으로 녹아있다.
  이 작품은 경험과 실력을 두루 갖춘 세 명의 창작자가 공동으로 작업했다. 이지나 연출가, 우디 박(Woody Pak)작곡가 그리고 이지혜 작곡가가 만든 창작 초연의 락 뮤지컬이다. 세 명의 배우(X, 존 파우스트, 그레첸)들과 네 명의 코러스 그리고 4인조 라이브 밴드가 무대를 채운다.
  뮤지컬 <더 데빌>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세 캐릭터의 뼈대와 기본적인 모티브만을 가져왔다. 이를 각종 병폐가 만연한 현대 자본주의 현실에 대입시킨다. 괴테가 살던 시대의 ‘메피스토펠레스’는 그저 유혹에 능한 악마였으나, 다원화된 현대의 그것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이 작품 속의 ‘X’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유사한 캐릭터이다. 하지만 존 파우스트가 만나는 X와, 그레첸의 눈을 통해 보여 지는 X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하나의 캐릭터가 두 가지 이상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보는 사람에 따라서 X의 성질과 역할은 달라진다. 이를 통해 ‘신과 악마(빛과 어둠)는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것이 아닐까?’라는 물음을 던진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괴물은 어딘가 그 자신과 닮아 있었고, ‘지킬’ 박사는 본인 내면의 하이드와 조우했듯이 말이다. 궁극적으로 빛과 어둠은 공존하며, 둘 중 무엇을 볼 것인지는 인간의 선택과 분별력에 달렸음을 보여준다. 결국 극의 말미에는 ‘인간의 의지와 사랑’이 무엇보다 강한 구원의 힘을 지니는 것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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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의 미니멀한 무대 위에는, 일반적인 뮤지컬에서는 보기 힘든 다양한 조명이 설치되어있고 이것이 드라마를 진행한다. 현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뉴욕 증권가가 배경이다. 무대의 양 옆에는 천장 가까이까지 치솟아 있는 철제 층계가 놓여있는데, 이는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꿈’(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 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계속해서 신 또는 절대자를 찾는 그레첸과 존, 그리고 X가 끊임없이 층계를 오르내리는 이유가 설명된다.
  블랙 먼데이를 겪으며 나약한 인간(존)은 절대자의 도움을 갈구한다. 이후 존과 그레첸은 욕망과 쾌락의 유혹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시험 당한다. 그 시험을 행하는 주체는 X인데, 그가 정장을 입고 있을 때는 ‘존이 보는 절대자’의 모습이다. 이는 소위 천사일 수도 악마일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흰 셔츠를 입었을 때 X는 ‘그레첸이 믿는 유일신’이 된다. 즉 절대자든 유일신이든, 악마든 천사든 인간이 보는 대로 모습을 달리한다. 결국 시험을 행하는 주체가 그 누구도 아닌 그들 스스로였을지도 모르겠다. 설상가상으로 순수하고 선한 영혼의 소유자 그레첸에게는, 블랙 먼데이를 겪은 수많은 타인의 고통까지 느껴진다. 그녀는 미칠 수밖에 없다.
  2막의 그레첸은 한층 더 광기 어린 모습이다. 자신이 믿는 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레첸도 자신의 희생을 통해 존을 구원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존도 X와 손잡은 스스로의 과오를 후회하며, 피로써 시간을 되돌리겠다는 맹세를 한다. 결국 신이나 절대자를 택하지 않고 ‘사랑’에 대한 믿음을 지킨 그레첸과 존은, 그 대가로 함께 구원 받는다.
  성경 구절을 각종 상징과 가사로 적극 차용하고 신을 전면에 내세운 이 작품은, 역설적이게도 신과 종교에 대해 철저하게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이를 위해 차가운 색감의 조명과 금속성의 철제 무대 세트를 사용했다. 음악으로는 현악기 중심의 중세 고딕 스타일을 구현했으며 이는 신비감을 조성한다. 이러한 장치들로 우리 안의 이성을 깨우려는 의도였을 거라 짐작된다. 극이 던지는 철학적 물음들에 관객 나름의 해답을 찾으면서 보게 되는 작품이다. 동시에 고딕소설 같은 괴기스러움도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구원은 인간의 의지와 사랑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휴머니즘적 믿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 중에는 음악이 스토리나 플롯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연극에 음악을 얹은 작품이 적지 않다. 음악이 없어도 극의 진행에 큰 문제가 없는 경우를 자주 본다. 하지만 <더 데빌>은 모든 넘버가 군더더기 없이 제 역할을 하며, 음악이 극의 진행에서 주체가 된다. 때문에 이 작품이 스토리나 플롯 중심의 극이 아니어도, 뮤지컬 장르의 본질에 충실했다고 생각한다. 세 캐릭터의 고뇌와 그들이 처한 상황이 가사와 음악에 잘 버무려져 있다. 가사가 친절하진 않지만 낭비도 없는 것이다. 동시에 심장을 두드리는 멜로디에 몸이 들썩이고 마음이 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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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적으로 미학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에 출중한 배우들이 투입되었음에도, <더 데빌>은 지난 8월 22일 개막 이후 여러 가지 의미로 논란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이 작품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창작 및 제작진들은 관객과 소통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더 데빌 나잇>처럼 공식적이거나, 혹은 <티타임 토크>와 같은 비공식적인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 이러한 개막 초반의 산통은 모든 뮤지컬의 디벨롭 과정에서 발생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 작품의 경우 그 산통의 강도가 유달리 심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 작품이 예술을 위한 예술을 고집하고 있지는 않다. 개막 초반에도 그러한 현학적인 난해함을 풍기지는 않았다. 단지 태생적으로 작품의 특성상 ‘상징’을 통해 이야기를 풀 수밖에 없었을 뿐이다. 그것이 이 작품에 어울리는 표현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난 한달 동안 그 상징들이 과도하게 해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작품의 메시지와 창작의도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소소한 수정이 이루어졌다. 상징의 나열에 그쳤던 것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거나, X의 의상 색깔 등을 통해 그 의도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 결과 작품이 추구하는 것이 보다 선명하게 전해졌다고 판단된다.
  한편 <더 데빌 나잇>에서 이지나 연출가는, “극의 시작부에는 존과 그레첸이 6년간 사귄 연인으로 등장하고, 끝날 때 둘은 7번째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다. 극 속에서 흐르는 1년은 물리적인 시간이다. 하지만 상대적인 시간은 더 긴데, 이것이 ‘그레첸의 악몽’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다. 블랙 먼데이로 인해 존 파우스트는 신을 부정하며 따지러 가기 위해 층계를 오른다. 이 때 갑자기 스토리가 뚝 끊기더니 난데없이 편지를 받는다. 이제 ‘판타지’가 시작되고, 제안(X의 편지)씬 부터 이상한 쇼 조명으로 바뀌는 것이다. 여기서 부터가 ‘그레첸의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이 악몽 속에서 시험을 당하나, 결국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으며 그들의 사랑과 의지로 이겨낸다. 그래서 이듬해 함께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맞게 된다. 쇼 조명을 주로 사용한 것은 이 작품을 ‘어른들을 위한, 생각할 거리가 있는 쇼 뮤지컬’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라고 전했다.
  이 설명을 듣는 순간 개인적으로 엉켜있던 의문들이 깨끗하게 풀렸다. 세 인물의 오락가락하는 언행도, 행복한 프롤로그와 수미상관을 이루는 에필로그의 존과 그레첸도, 희랍 비극에 나올법한 코러스도 깔끔하게 이해되었다. 꿈과 쇼는 추상적이며 비논리적인 측면이 있으니까. 또한 ‘야곱의 꿈’을 연상시키는 무대 위에서, 극의 대부분의 시간이 ‘그레첸의 악몽’으로 흐른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나니 굉장히 아쉬웠다. 그레첸의 악몽이라는 점을 조금만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면, 이 작품만이 갖는 매력을 충분히 어필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반전 영화를 본 것 같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공연장을 나설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설명적인 ‘친절함’은 경계해야 하지만, 전하고자하는 ‘명확한’ 그림을 보여줌으로써 이 작품의 진가와 재미까지 배가할 수 있을 거라 본다. 그러면 지금의 고통스러운 산통을 끝내고 <더 데빌>이라는 새 생명이 비로소 이 세상과 온전히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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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요즘 뉴스를 보고 있자면, ‘과연 신은 존재하나? 만약 신이 존재하더라도 자비를 기대해서는 안 되나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 같은 자비로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끊이지 않는 사건·사고 속에서 결국 희생되는 것은 선한 생명들이다. 아마도 창작자들은 이와 비슷한 생각을, 관객들과 그리고 우리 사회와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레첸의 악몽처럼 지금의 시간이 그저 악몽에 지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한 이 작품이 역설하듯, 이 난국을 타계할 구원책은 우리들 스스로에게 있다고 믿는다. 인간을 시험하는 것은 인간이며, 인간을 구원하는 것 또한 인간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지금 2014년 대한민국 사회에 꼭 필요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별도의 프리뷰 기간을 가짐으로써, 초반의 논란을 최소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관객의 의견을 모니터하며 작품을 수정·보완하는 시간을 갖고, 그 이후에 관객을 만났다면 객석 반응이 지금보다 훨씬 우호적이었을 것으로 예상한다.
  우리나라 관객들은 무대극·영화·TV드라마를 막론하고 탄탄한 플롯 중심의 기승전결이 확실한 스토리텔링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뮤지컬이나 연극은 비교적 다양한 실험이 가능한 장르이다.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영상매체와 달리 무대에서만 구현할 수 있는 ‘판타지’가 있기 때문이다.
  찰스 다윈은 ‘다양한 변이가 발생되면 그 중 일부가 선택되고 이것이 종의 진화로 이어 진다’고 했다. <더 데빌>이라는 이상하고도 난해한 돌연변이가 일회적인 실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시발점이 될 수는 없을까. 이 사과 같은 판타지가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기존 스토리 중심 뮤지컬의 문법과 형식을 해체하면서도 뮤지컬이 갖는 장르적 본질에는 충실한 이 작품이, 성장하고 선택되어 생명력을 지니길 바란다. 그래서 또 다른 형식을 개척하며 우리 뮤지컬 시장에 획일성보다는 다양성을 퍼뜨리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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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캐스트로 관람한 후 작성된 글임을 밝힙니다.
2014.08.27 20시 공연 – 한지상(X), 윤형렬(존 파우스트), 차지연(그레첸)
2014.08.30. 19시 공연 – 마이클 리(X), 송용진(존 파우스트), 차지연(그레첸)
2014.09.18. 20시 공연 – 이충주(X), 윤형렬(존 파우스트), 장은아(그레첸)

 

◈ 공연기간 : 2014.08.22 ~ 2014.11.02
◈ 공연장소 :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서울 종로구)
◈ 출연진 : 마이클 리, 송용진, 한지상, 김재범, 윤형렬, 박영수, 차지연, 장은아, 이충주 (코러스: 김미로, 김다혜, 정우빈, 임창민)
◈ 제작진 : 이지나 연출,대본,작사 / Woody pak 작곡,작사 / 이지혜 작곡,작사 / 피정훈 편곡 / 서병구 안무 / 신은경 음악감독 / 오필영 무대디자인 / 원유섭 조명디자인 / 박민호 기술디자인 / 한승수 의상디자인 / 김필수 음향디자인 / 김숙희 분장디자인 등


글. 이은영 (vivid@stagekey.co.kr)
사진. 클립서비스 / 복정진(bjj1129a@naver.com) / 김윤화(Kyoonhwa90@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