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NEWS REVIEW 괴물과 인간의 의미 <프랑켄슈타인>

괴물과 인간의 의미 <프랑켄슈타인>

194
0
SHARE

 

누가 더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지 주변 사람들과 내기해 본적이 있는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르는 이런 내기로부터 하나의 ‘고전’이 탄생했다면 어떨까?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이 바로 그렇게 탄생했다. 과학소설이나 환상소설, 여성주의 소설의 대표작으로도 꼽히는 <프랑켄슈타인>은, 숱한 수식어처럼 하나의 작품이 얼마나 다양한 의미로 읽힐 수 있는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만큼 <프랑켄슈타인> 속의 인물들은 다층적이다.

원작은 액자식구조로 북극으로 항해를 떠나는 월튼이 자신의 누나에게 편지를 쓰며 그가 듣고 경험한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월튼이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를 전하듯, 빅터는 북극 항해를 꿈꾸는 월튼을 변호한다. 메리 셸리는 항해를 통한 영토 확장을 꿈꾸는 일과 과학기술을 통해 생명을 창조하려는 열망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월튼 대장, 내가 비길 데 없이 큰 불행을 겪었다는 것을 당신은 쉽게 알았을 겁니다. 한때 나는 이 불행에 대한 기억을 안고 죽으려고 결심했지요. 그러나 당신이 내 결심을 바꿔 놓았어요. 내가 한때 그랬던 것처럼 당신은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고 있어요. 나는 당신이 바라던 것을 충족하게 되었을 때 내게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당신을 무는 독사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겪고 있는 불행을 이야기해 주는 것이 당신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군요. 그러나 당신이 나와 같은 길을 추구하고 있고, 나를 현재와 같은 상황에 빠트린 똑같은 위험에 당신 또한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내 이야기로부터 적절한 교훈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 『프랑켄슈타인』 中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는 원제에서처럼, 셸리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를 충실히 불러냈다. 흔히 ‘프랑켄슈타인’을 ‘괴물’의 이름으로 착각할 만큼, 괴물을 만든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은 닮아있다. 어머니와 연인을 상실한 빅터가 창조의 비밀을 파헤치며 신에게 도전하는 프로메테우스라면, ‘괴물’은 아버지이자 창조주인 빅터처럼, 자신을 만들어낸 인간처럼 살기 원하며 빅터를 위협하는 프로메테우스인 것이다.

  “나는 거의 2년 동안 죽은 몸에 생명을 불어넣겠다는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이 목표를 위해 휴식도 취하지 않고 건강도 돌보지 않았습니다.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그 목표를 달성하고 싶어했어요. 그러나 그 목표를 이루고 나자 아름다운 꿈은 사라지고 숨 막힐 듯한 두려움과 혐오감이 내 가슴을 가득 채웠습니다. 내가 창조한 존재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나는 방을 뛰쳐나오고 말았습니다.” – 『프랑켄슈타인』 中

  이 소설이 의미를 갖는 지점은, 바로 괴물에게 발언권을 주는 소설의 중반부라고 할 수 있다. 이름도 없이 ‘괴물’로 지칭되는, 인간과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된 존재에게 직접 발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셸리의 정치적 급진성이 드러난다. 월튼과 빅터가 상징하는 남성과 과학문명, 제국으로부터 괴물은 소외당하고 버려진 ‘타자’이다. 흉측한 겉모습을 한 괴물을 통해서만 정말 ‘괴물같은’ 인간과 과학기술의 폭력성, 무책임이 폭로된다. 괴물의 발언을 통해 인간보다 더욱 인간답고 지적인 존재를 보게 된다. 그렇게 창조주의 통제를 넘어섰기 때문에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내 기분에 공감하고 내 우울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아 주는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꿈일 뿐이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을 만들어 준 하느님에게 탄원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내 창조주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는 나를 버렸습니다. 쓰라린 마음을 안고 나는 그를 저주했습니다.” – 『프랑켄슈타인』 中

* 원작 인용 –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이미선 옮김, 황금가지, 2009.

 

  무대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원작의 설정만 남기고 많은 부분에서 새롭게 각색됐다. 빅터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과 고독 속에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실험에 집착한다는 점에서는 원작과 비슷하다. 그러나 원작 속의 빅터에게 통제 가능한 행복한 가정과 과거가 있었던 것과는 달리, 무대 위의 빅터는 유년시절부터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나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전무했다. 그런 그에게 앙리의 등장은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뮤지컬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앙리인데, 1막에서 빅터를 흠모하고 따르던 그가 2막에서 괴물로 분신한다는 점은 흥미롭지만, 원작에서 괴물이라는 존재가 갖는 다양한 의미는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 빅터의 실험에 전적으로 동조하며 목숨까지 내놓았던 앙리가 괴물로 다시 태어날 때, 괴물이 남성 혹은 기술과 제국이라는 폭력 속에서 소외된 ‘타자’라는 상징은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때문에 2막 이후로 펼쳐지는 빅터와 괴물의 싸움은, 새로운 의미를 갖지 못하고 그저 외로움을 느끼던 이들이 서로에게 벌이는 복수극과 애증에 그칠 뿐이다.

   괴물의 존재를 어떻게 그려내는지가 <프랑켄슈타인>을 제목으로 하는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점에서 뮤지컬은 원작의 주제를 너무 가볍게 처리한다. 앙리의 ‘머리’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무대 위의 괴물은 흉터를 통해서만 ‘괴물처럼’ 보일 뿐이다. 무대 위의 괴물은 앙리로서의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언어를 되찾는다. 괴물의 언어는 앙리의 언어이며, 괴물의 목소리는 공동체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빅터 내부의 광기를 반복하는데 그친다. 때문에 괴물의 고독은 빅터에게 버려진 앙리의 외로움으로써 기능할 뿐이다. 1인 2역을 소화하는 배우들의 열연과 라이브 음악의 생동감, 화려한 무대장치는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메리셸리의 문제의식이 새롭게 해석되지 못한 점은 아쉽다. <프랑켄슈타인>의 다음 무대에서는 조금 더 색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글. 이정민기자 (jmlart24@gmail.com)